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에 맞서 장인이 장인으로서의 훌륭함(아레테)을 수행하려면 그 기능 또는 기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듯이, 인간으로서의 훌륭함(아레테), 즉 덕을 수행하려면 그것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6] 불행하게도 소크라테스는 인심을 거스른 사고로부터 각성시키려고 한 그의 태도 때문에 근시안적인 아테네의 주권자로부터 "신을 부정하고 청년들을 현혹시켰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기원전 399년 독배를 마시게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비명(非命)의 생애를 마친 뒤에 그의 제자들은 분열하여, 진정한 철학적 견지를 유지하려고 한 일파와, 스승으로부터 단순히 도덕적 자주만을 받아들여 오직 이 일면의 수양만을 문제삼은 사람들로 분파(分派)되었다. 후자에 속하는 것은 키니코스 학파와 키레네 학파이다. 키니코스 학파에 있어서 덕(德)이란 무욕(無欲)이었다.
그들은 이 원칙을 철저히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 실천하고 고대 수도승으로서 각지를 방랑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시범을 보였다. 이 키니코스 학파와 정반대되는 키레네 학파는 '최고선이란 향락이다'라는 쾌락주의의 철학을 창도하였다. 키니코스 학파와 키레네 학파를 비롯한 '불완전한 소크라테스의 무리'에 비하여 진정한 철학의 길을 걸은 제자는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초기의 대화편(對話篇)에서는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여 주로 도덕적인 개념을 엄밀히 규정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그 후 점점 인식론적, 형이상학적으로 심화되어, 모든 감성적인 것의 원형(原型) 또는 본(本)으로서 영원 불멸한 이데아(idea)에 관한 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플라톤은 끊임없이 유전 변화(流轉變化)하고 우리의 감관 지각(感官知覺)의 대상인 현실세계를 넘어선 곳에 그 원형이요 이상인 이데아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초월론적인 세계의 존재론을 인정하지 않고 이데아를 사물 가운데 내재(내재 형상)하는 것이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사물은 이데아(이 말은 형상, 본질, 본성을 의미한다)와 그 기저(基底)로서의 질료(質料) 등 두 요소로부터 성립하는 것이며, 질료가 그 이데아를 완전히 실현하려고 하는 곳에 운동,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이 세운 학교 아카데메이아를 스승 사후에 떠나 자신의 학교인 리케이온(Lykeion)을 거닐면서 강의하였으므로, 후세에 그의 학파를 소요학파(逍遙學派, Peripatetics)라고도 한다. 그는 일체의 지식을 포괄하려는 희망을 품은 최초의 사람으로서, 그의 연구는 자연 과학, 역사, 교육, 문학, 정치 등을 아울렀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고 아카데메이아파) 아리스토텔레스 (소요학파 또는 페리파트스파) 키니코스 학파 (견유학파) - 안티스테네스(소크라테스의 제자), 디오게네스, 테베의 크라테